어느덧 2021년의 마지막 달 12월, 어스름 석양이다. 내 운명도 어스름 석양임이 분명한 것 같다. 한 해가 이울도록 병고 이야기에 매달려 있는 내 신세가 처량하고도 비참하댜, 한해를 마감하면서 아내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한다. 아내의 나에 대한 간병은 일반 환자 간병과는 다르다. 복막투석 환자에다가 걷지도 못하는 신세, 게다가 코 점막 손상에 의한 만성 코 질환에 시달리며 사는 이중 삼중 환자를 돌보는 것이니 그 삶은 여간 불행한 삶이 아닐 터이다. 내 손으로는 쓰레기 하나도 버릴 수 없으니 모든 일은 아내 몫이었
이 칼럼 같지 않은 칼럼을 이만 마치려고 한다. 더 적고 싶은 얘기가 조금은 더 남아 있는 것 같지만 이번 회로 마칠 수밖에 없다. 종점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내 마지막 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6년 동안 필사적으로 투병을 했다. 이 연재 글 역시 필사적인 투병이었다. 보잘것없는 토막글 하나 쓰는데 매번 이삼일이나 걸렸고, 수없이 코가래를 뱉으며 써야 했다. 컴퓨터 앞에 놓은 종이컵 안에 계속 쌓이는 거품 같기도 하고 괴물 같기도 한 코가래는 마귀의 흉상이기도 했다. 코 점막 손상이 이토록 괴롭고도 치명적
우리 부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내 코 질환은 이제 극도로 악화되어서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비강의 미묘한 통증과 함께 한도 끝도 없이 무수히 빈발하는 코 가래는 온전히 내 일상생활이 되어버렸다. 종래에는 코질환으로 수명을 다하게 되고, 종점의 시간이 임박했다는 공포감과 암담함이 엄습하곤 한다. 매일 밤 수면제 복용으로 짧은 선잠이나마 수면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마나 다행이다. 온종일 코가래에 시달리다 보면 때로는 진저리가 쳐지기도 하고 오금이 저리고 급기야는 기진맥진 상태가 된다. 얼마 전 서울의 그
나는 방구들장 신부님께서 주신 그 1천만 원 중에서 일부는 2012년 등단 30주년 기념시집 출간 비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잘 두었다가 올해 3월 ‘촛불시집’ 출간비에 보탰다. 는 촛불혁명 당시 서울광장 등에서 촛불시민들께 전량을 무료 배포했고, 촛불시집은 현재도 무료 증정과 판매를 병행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소개하고 싶은 일이 있다. 나는 2014년에 두 개의 글을 인터넷 매체 에 기고했다. 두 개 모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께 보내는 ‘공개편지’ 형식의 글인데, 메인면에
지난 6월 27일 천주교 수원교구 원로 사제이신 방구들장(대건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카톡 메시지 한 통을 보내주셨다. 광고란에 오른 코질환 한방 치료제 청비환을 개발한 모 한의원 원장의 인터뷰 기사를 폰 카메라로 찍어 보내주신 것이었다. 나는 휴대폰 안의 그 기사를 크기 조절을 하면서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리고 서울의 그 한의원에 전화를 걸어 원장과 통화를 했다. 원장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 이름이 그 한의원 컴퓨터에 입력되어 있는 덕이었다. 나는 3년 전에도 페이스북에서 청비환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그날로 청비환
나는 극심한 불편과 고통 속에서 어렵사리 이 글을 쓰고 있다. 코 점막 손상의 후유증, 그 희망 없는 막막함을 어떻게 설명할까. 누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코의 비강 아래 쪽 목구멍 가까이에서 무시로 기어 나와 굳는 현상, 수면제로 몇 시간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콧속인지 목구멍 속인지에 뻑뻑하게 차 있는 그 기묘한 가래라는 괴물을, 수시로 물을 마시며 무수히 뱉어야 하는 고역은 우선 비참한 심정을 갖게 한다. 또 그 괴로움과 비참한 심정은 무수히 자살 충동을 유발한다. 정말로 죽고만 싶다, 이렇게 메일같이 고통을
아내는 내 글의 충실한 애독자다. 거의 모든 글을 세심하게 읽는다. 이 부박한 세상에서 아내마저 내 글을 읽지 않는다면 어찌 살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아내는 이 병고 이야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우충충한 병고 이야기는 이제 그만 쓰라고 타박을 한다. 지면도 그렇고, 누가 그런 글을 읽겠느냐는 말도 한다. 그렇잖아도 앞으로 두세 번만 더 쓰면 병고 이야기는 끝날 거라는 말을 해줬다. 그 사이사이에 일반 칼럼도 쓸 생각이다. 에서 내 글을 읽은 독자들 중에는 서산의료원과의 합의 문제를 혹 궁금해 하는 분도 있을지
병고가 5년째 지속되다 보니 시시때때로 지난 1월 중순이었던가, 일시적으로 찾아왔던 놀라운 호전 상태가 간절히 그립다.그것은 일정 부분 코로나 덕이었다. 그 무렵 나는 병고의 악화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을 자지도 못하며 시달리다 보니 혼절 상태까지 이르렀다. 그때는 한창 촛불시집 편집 작업에 몰두하던 중이었는데, 그 모든 일을 떼걸어 놓은 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의식불명 상태로 가래 뱉기만 계속하고 있었다.코로나 방역망에 정통으로 걸려들다 겁을 먹은 아내가 출근을 한 딸과 멀리 인천에서 직장생활을
5년 전(2017년 6월 7일) 비염수술과 재수술로 말미암은 병고의 지속으로 당분간은 더 병고 관련 얘기를 써야 할 것 같다. 지난해 소책자로 펴낸 의 후속 이야기를 쓰고픈 마음도 있었다. 나는 내 괴이한 코 질환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의료사고로 생겨난 병(일종의 장애)임을 초기에 알았을 때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울의 코비한의원에서 코의 원래 구조에 변형이 생겨서 치료에 한계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또 중앙보훈병원과 삼성병원에서 코의 점막 공간이
황혼기의 초입에서부터 괴이한 병고를 겪게 되면서 지난 세월의 궤적 안에 덩두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보람되고 행복했던 일들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돌이켜 보면 멀지 않은 60대 시절, 10여 년 간의 삶이 가장 뜨겁고도 절실했던 것 같다.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한 그때의 나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은 기관지 2021년 5월 9일 자에 최근 출간된 내 촛불시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소설가 지요하 막시모 선생이 지난 3월 시집 〈이승의 영마루에서 오늘도 꿈을 꾼다>를 내셨습니다.
지난 3월 ‘촛불시집’이’란 걸 만든 것 역시 ‘낭패’로 남을 것 같다. 비용도 적잖게 들였고, 사전에 배포 비용과 공력 낭비를 각오한 일이건만, 후회라는 것이 가까이에서 곁눈질을 하는 것만 같다. 그런 마음의 한 옆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후회하지 말자는 오기 같은 것이 곤두서는 것 같다. 코 질환 문제는 이미 엎질러진 일이었다. 아해 봤자 내 코가 정상 상태로 돌아오기는 이미 그른 일이다. 이제는 5년 전의 정상 상태가 오직 그립기만 하다. 특이한 코 질환을 겪는 사이내 몸은 90노인 행색이 되어버렸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 역시
드디어 내 ‘촛불시집’이 출간됐다. 출간 일을 삼일절에 맞추려고 건강치 못한 몸으로 무리를 했지만, 삼일절에 책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시집의 마지막 글인 ‘편집후기’를 삼일절에 마쳤으므로 시집의 발간일지를 2021년 3월 1일로 표기했다. 내 촛불시집에는 총68편의 목적시들이 담겨 세상을 보게 됐다. 면수는 290면인데 시집치고는 꽤 두꺼운 편이다 이 68편의 시들을 3부로 나누었는데, 1부에는 ‘영원불멸의 기운을 안고/다시 불씨를 피우려는 마음’이라는 중간 제목을 붙였고. 2부는 ‘진실한 마음으로/축시 헌시 추모시’로 가름했다
해가 바뀌면서 1월 한 달을 병원 생활로 보냈다. 참 고통스럽고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게 베푸신 하느님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지난해 12월 말부터 허리통증이 유난히 심했다. 복막투석기가 있는 내 방과 바로 옆 화장실 사이는 몇 발짝 되지 않는데, 1월 2일 밤에는 화장실을 갈 때 한없이 멀게 느껴지면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한번 넘어지면 도저히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으니, 나를 일이키기 위해 아내도 무진 애를 써야 했다.그런데 겨우 복귀한 침실에서 몇 시간 후 다시 화장실을 가다가 또
지역신문인 에 햇수로 2년 동안(2019년 7월∼2020년 12월) 연재했던 ‘끝나지 않은 투병기’를 2020년 상반기호(44집)와 하반기호(45집)에 나누어 싣고 나서 별도의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점막 손상에 의한 심각한 코 질환의 시초, 점막 장애를 고치기 위한 4년 여 동안의 필사적인 노력, 또 인위적인 코 질환으로 겪는 병고(病苦)의 내용 등을 소상히 기록한 글입니다. 책자 안의 글에도 기술을 했지만, 서산의료원에서는 의료사고가 명백함에도 그 책임에 관하여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
지난해 2020년이 거의 기울어가던 12월 16일 아침 내 노친께서 고단했던 96년 동안의 삶을 접으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훼방 때문에 태안성당 장례미사도, 장례식장에서의 연도도 성가는 부르지 않고 진행해야 했다. 오로지 미사 후의 ‘고별식’ 성가만을 소수의 성가대가 부를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위탁으로 운영하는 서천 복지마을의 요양병원에서 선종하신 노친의 임종도 보지 못했다. 코로나로 면회가 전면 중지되어 있는데다가 임종이 거의 임박했을 때서야 연락을 받아 도저히 노친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나는 코가래를 뱉을 종이컵을 주머니에 넣고 성당묘원으로 가면서 다시금 비참해지는 심정이었다.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성당 묘원으로 가서 휠체어에 옮겨 탔다. 두세 사람에게 수고를 끼치며 묘소 뒤로 내려가 주임신부님이 주례하시는 묘지 축성 예절에 참례했다. 나는 예절이 진행되는 동안 하느님께 또 선친께도 내 병고를 고백하며 탈출구를 열어주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10월 20일부터 다시 시작한 한방치료에 서광이 비치기를 빌고 또 빌었다. 1986년 2월 선친 장례 후 34년 만인 올해 어떤 예기치 않았던 일이 발생하여 11월 ‘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금 내 가난이 부끄럽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깟 300만 원도 손쉽게 지출하지 못하고 고심을 하는 내 궁색한 사정이 슬프고 딱하게만 느껴져서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동안 나는 내 가난이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딸과 아들을 대학까지 가르치고 자리를 잡도록 도와주면 그것으로 내 소임이 끝나는 줄로 알았다. 아내의 퇴직금으로 2017년 4월 아들을 결혼시킨 것도 아내에게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그저 고맙고 대견한 마음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며느리를 보고 손자를 보게 되니(또 올해 12월이면 손녀도 보게 되니) 생각이
나는 지난 4월부터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서울 서초동의 모 한의원을 다니며 처음 접해본 특이한 방법으로 진료를 받았으나, 9월이 다 가도록 전혀 변화가 없고 돈만 엄청 들어 그 한의원 치료를 포기했다. 한방치료비가 비싸다는 것은 일찍이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서초동 그 한의원의 치료비는 유난히 비쌌다. 치료 예정 기간 2년 동안 지출해야 할 돈이 무려 2,000만 원이 넘었다. 공무원인 딸이 운전을 맡아 한 달에 한 번 꼴로 토요일에 서울 서초동을 다니는 것도 힘들고 희망도 생기지 않고 해서 그 한의원을 가지 않기로 했다. 그
저쪽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긴, 대꾸할 말이 없을 터였다. 나는 답답해서 화난 소리로 물었다. “듣고 있습니까? 왜 말이 없습니까? 무슨 말이건 좀 해보세요.” 그랬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이미 피신청인의 부동의로 사건은 각하되었습니다.” 이런 로봇 같은 말뿐이었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높은 양반들과 상의도 해보고 일을 제대로 하세요. 나는 언론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네요.” 통화를 마치자 허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진짜 허탈감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실체를 다음 날 제대
그런데 그 원무과 여직원은 내게 미안했는지 다시 한 번 윗사람들과 협의를 해보고 나서 다시 전화를 드리겠노라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공연히 쓸데없는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다음 날 그 여직원의 전화를 다시 받았는데, 위로금 190만원 결정을 변경할 수는 없다고 했다. 나는 통화를 마치면서 또 공연히 서산의료원 사람들이 너무 쩨쩨하고 옹졸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 여직원은 내게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조정중재 신청을 해보라고 했다. 나는 즉시 문석호 법률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사무장에게서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대한 정보를 얻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