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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추모공원은 한국전쟁전후경주민간인희생자 유족과 경주시장의 의지가 모아진 합작품[다크투어] 한국전쟁 태안민간인희생자 추모위한 평화공원, 무엇을 담아야 하나
김동이 기자  |  east33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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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8.25  09:3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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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의 대표공원인 황성공원 한자리에 자리 잡아 보수텃밭서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희생자 추모의 장으로 승화
김유신 장군 동상 인근에 추모공원 위치해 상징성도 더해져… 향후 경주민간인희생자 아픔 담긴 백서도 출간 계획


<편집자주> 태안에서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7월부터 같은 해 12월까지 부역혐의자와 보도연맹사건으로 12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구체적으로는 보도연맹 115명과 인민군 치하에서 희생된 자유수호희생자 115명을 비롯해 부역혐의 희생자 900명을 포함해 모두 1200여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보도연맹 희생자와 자유수호희생자의 숫자가 같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자유수호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탑은 옥파 이종일 선생 생가지 옆에 위패를 모신 채 매년 이곳에서 추모제가 거행되고 있지만 무고한 죽음을 맞은 좌익 희생자들인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들은 추모탑 하나 건립되지 못한 채 매년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합동추모제를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태안유족들이 고령화로 인해 매년 추모제에 참석하는 유족의 수가 줄고 있는 시점이지만 태안유족들의 한을 풀어줄 추모탑 건립은 요원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유족회와 지자체의 노력으로 추모탑을 건립해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는 지자체를 찾아 평화공원 건립을 위한 노력을 취재하고, 향후 태안평화공원 조성 시 어떠한 콘텐츠를 입혀야 하는지 제시해보고자 한다. 또한 유족들을 만나 그들의 입을 통해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와 좌익에 의해 희생된 자유수호희생자의 합동 추모제를 지낼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해보고자 한다.

   
▲ 경주민간인희생자추모탑은 지난 2016년 11월 경주유족회와 최양식 경주시장의 추진의지로 건립됐다.

경북 경주시 한국전쟁전후경주민간인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공원은 경주시장의 의지와 경주민간인희생자 유족들을 위해 한평생 헌신한 한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안민간인희생자유족회에 정석희 회장이 있다면 경주에는 오직 ‘민간인희생자’의 억울함을 달래고 그 넋을 기리기 위해 20대부터 하루의 쉼도 허락하지 않고 굳세게 달려온 90세(1933년 출생) 고령의 김하종 유족회장이 있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대학에 입학했으면서도 연좌제에 묶여 그 꿈을 접어야만 했던 김하종 유족회장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교과서 그 자체였다. 그가 구속됐을 당시 감옥에서 만난 인연들만 하더라도 역사책 수십권은 쓸 수 있을 정도다. 그의 젊은 시절 삶을 전해들은 주변의 지인들이나 심지어 국회의원까지 나서 자서전을 써볼 생각이 없느냐고 권유하고 있을 정도다. 

그가 만난 인연을 떠나 그의 인생 대부분은 ‘민간인희생자’들의 억울한 희생이 묻혀지지 않도록 진상규명에 나서는 일이었다. 비단 그가 나고 자란 경주시 뿐만 아니라 전국의 억울한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통칭 ‘과거사법’) 개정을 위한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내고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20일 경주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하종 유족회장은 20대부터 민간인희생자를 위해 투신했던 만큼 그가 살아온 생생한 투쟁의 역사들을 소환했다.
 
“27세부터 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을 맡았고, 1961년도에 혁명 재판도 받아봤다”고 운을 뗀 김 유족회장은 “민간인희생자 유족회 활동 한 죄밖에 없는데 반국가행위라고 혐의가 되어 있었다. 역적이었다”면서 “통일호 기차에서 내리니까 곧바로 혁명재판소로 끌고 갔다. 거기에서 박정희와는 악연인 황태성도 만났고, 백인엽도 만났다. 정치깡패 이정재, 조용수(민족일보 사장)의 사형 집행도 봤다”고 회상했다. 당시 김 유족회장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3년 만에 석방됐다. 하지만 연좌제에 걸려 요시찰 인원으로 찍혀 김 유족회장 주변에는 항상 경찰이 지키면서 활동에 제한이 있었지만 민간인희생자 유족들을 위한 그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고, 오늘날 경주유족회가 명맥을 유지하고 백서 집필을 이어가는 역사적 모임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기억을 더듬어 자서전도 집필 중”이라는 김 유족회장은 경주민간인희생자와 관련해 “보도연맹 34명 등 민간인희생자 79명이 전부 승소했다. 4대 국회서 발간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1960년 6월 한달 동안 경주시와 월성군에서 접수받은 게 530여 명이었다”면서 “하지만 경주유족회에서 접수 받은 건 860명”이라고 밝혔다.

경주가 보수지역임에도 1960년대에 민간인희생자유족 진상규명 조사보고서가 나온 이유에 대해 묻자 김 유족회장은 “내가 유족회 활동도 했고, 심지어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도 공부는 하지 않고 유족회 활동을 했다. 연좌제 때문에 고시 합격은 꿈도 못꿨다”면서 “국회에서 특별법이 통과 돼서 고향 경주에서 유족회 활동하기로 마음 먹었고, 160여 명의 유족회를 구성했다”고 유족회를 만든 계기도 설명했다.

“유족회원들이 잘 단합해서 운영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도 한 김 유족회장은 앞으로 “현재 모든 자료를 취합해서 경주만의 백서를 만들고 있다. 2기 진화위 조사결과가 나오면 그 진실규명 결과까지 포함해서 백서를 만들 예정으로 백서가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면서 “개인적으로는 기억을 더듬어 자서전을 쓸 예정”이라고 밝혔다.

   
▲ 지난 7월 경주유족회를 방문한 본지 기자와 태안유족회 강희권 상임이사가 김하종 유족회장 등 경주유족들과 추모탑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하종 유족회장의 민간인희생자를 기리는 열정이 만들어 낸 상징물

그렇게 한 평생을 오직 ‘민간인희생자’들을 위해 애써온 김하종 유족회장과 유족들의 의지, 그리고 민간인희생자 유족이었던 제32대 최양식 경주시장의 추진의지가 더해져 경주시에는 지난 2016년 11월 19일 경주시의 대표적인 공원인 황성공원의 한 켠에 추모탑과 함께 추모제를 지낼 수 있는 추모공원이 조성됐다. 추모탑은 지난 2015년 9월 위령사업 등 지원조례를 제정한 이후 사업과 관련한 유족 간담회개최 등 여러 가지 행정절차를 거쳐 사업비 1억5천만원을 들여 탄생했다.

추모공원과 경주시의 민간인희생자 추모탑은 억울하게 죽어간 860여 명의 넋을 추모하고 있다. 그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2016년 11월 19일 조성된 경주 위령탑의 의미는 위령탑 건립기에 잘 나타나있다. 위령탑에는 건립기와 함께 추모탑 건립을 주도한 최양식 경주시장과 김하종 (사)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주유족회장의 이름도 새겨졌다. 위령탑에 새겨진 건립기를 그대로 옮겨 보면 이렇다.

   
▲ 김하종 경주유족회장이 경주민간인희생자사건과 추모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우리 경주에서도 수많은 민간인들이 정치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칠십여 성상이 흘러간 지금,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으나 이제라도 희생자 860여 위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며, 인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함은 물론이요. 나아가 세계평화와 국민화합을 지향하는 교육의 도장으로 삼고자 이곳 황성공원에 경주시의 예산으로 민간인 희생자들을 기리고자 ‘위령탑’을 건립합니다. 영령들이시여! 부디 고이 영면 하소서!」

한국전쟁전후경주민간인희생자 사건이란

경북 경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1차적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군과 경찰이 관할지역의 국민보도연맹 등 예비검속된 사람들을 불법 살해한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이다. 군과 경찰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해 법적 근거와 절차도 없이 살해한 명백한 불법행위를 자행했다.

   
▲ 살아있는 역사교과서 김하종 유족회장이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진화위의 진실규명결정서와 경주유족들의 주장에 따르면 경주민간인희생자들은 1950년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거나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 등으로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돼 경주경찰서와 지서 유치장 등에 일시 구금됐고, 이후 법적 절차 없이 경주지역 도처에서 경주경찰서 소속 경찰과 CIC 경주지구 파견대 등에 의해 집단 살해되었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자 유족들은 1960년 4·19혁명 이후 장면 정부가 들어서자 유족회를 결성, 진실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경주 유족들도 한국전쟁 전 민간인에 대한 학살로 악명 높았던 이협우(민보단장)를 고소했고, 동시에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기 위해 1960년 9월 5일 경주시 노동리 241번지에서 김하종 위원장을 필두로 경주유족회를 결성했다. 경주유족회원은 당시 860여 명에 달했다. 경주유족회는 경주 각지에서 신고를 받아 자체 조사 등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고, 1960년 1월 13일 경주 계림국민학교에서 역사적인 ‘경주지구 피학살자 합동 위령제’를 개최하게 됐다. 이후 제4대 국회가 1960년 5월 23일 제35회 제19차 본회를 열어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 5월 27일부터 조사특위를 설치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1960년 6월 21일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보고서’를 제42차 본회의에서 최종 의결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이후 김하종 위원장을 비롯한 경주유족회 핵심 간부를 포함한 전국이 피학살자 유족회 대표들이 ‘혁명재판(군법회의)’에 회부되면서 유족회 활동은 중단됐다.

한가지 특이할 점은 우리나라 대표 보수지역인 경북에서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희생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경상북도의회를 중심으로 한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가 설치돼 본격 조사에 착수, 9차례에 걸친 사건 현장 조사 후 유족들의 증언을 담은 속기록 등을 포함한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결과 보고서’를 발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주지역에서 집단 희생된 사실을 규명한 결과 ‘경북 경주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과 관련해 총 41명의 희생자 신원을 확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 사진은 1960년 당시 양민학살자신고서.

경주민간인희생자과 그 유족들을 위해 여전히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김하종 유족회장은 “현재 260명의 회원이 유족회 활동을 하고 있고, 회비도 걷으면서 경주민간인희생자들의 넋을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면서 “경주시에서도 매년 1200만원을 위령제 예산으로 지원해주고 있는데, 200~300명 정도가 참석하는데 책자도 만들고 식사도 하고 이벤트도 마련하고 있다. 경주시의 관심에도 고맙게 생각한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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