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예비군 태안읍대장 조병석
▲ 전)예비군 태안읍대장 조병석

 2차 세계대전의 종전 결과물로 한반도는 비극의 남북분단이 되어 현재도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첨예한 대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선말 우리의 국력이 약해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그 사슬을 조선의 백성이 끊으려 목숨을 바치며 노력을 하였지만 외세에 의해서 광복이 되고 원치 않는 소련(현,러시아)과 미국의 힘에 의해 남북분단이 되고 북에는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본명 김성주)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남에는 미 군정을 3년간 실시한 후에 대한민국의 이승만이 지도자로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첨예한 대립이 시작됩니다.

 미국의 방해로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하지 못한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의 김일성은 무력점령에 의한 적화통일을 계획, 승인하고 지원하며, 6.25 남침전쟁을 단 3개월이내에 부산까지 완전점령하여 소련과 국경선이 맞닿아 있는 나라를 공산화하고, 전세계를 공산화한다는 망상를 가지고 전쟁을 독려하지만 유엔에서 침략자를 북한군으로 규정하고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철수하라.”는 유엔의 지시를 무시하고 파죽지세로 남으로 남으로 전선을 확대하며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듯이 행동합니다.

 미국은 유엔의 참전국보다 가장 빠르게 일본에 있던 미 24사단의 선발대 스미스대대가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고개에서 1950.7.5. 세상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인민군과 교전을 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며 인민군의 전력이 만만치 않고 앞으로 전쟁의 불길함을 깨닫게 됩니다.

미 24사단의 본진이 부산을 거쳐 충남 지역에서 지연전을 펼치면서 한국군이 재편성되고,
유엔군이 한국땅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사단장(딘 소장, 휴전후 포로교환 복귀)이 포로가 될 정도로 고군분투하였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인민군의 전투력은 점점 작전한계점에 다다르고 포병대대장이 귀순(정봉욱중좌,한군군에 편입되어 소장예편)하여 인민군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어 미군B-52폭격기 등에 의한 융단폭격으로 인민군의 기세는 꺾이고 속속들이 한반도에 도착한 전투부대16개 나라의 유엔군은 제 역할을 다하며 전력이 증강되어가고 모두가 반대한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마침내 서울을 동년 9월28일 수복하고 북진을 거듭하여 한반도의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늦가을에 압록강 너머에 북한을 지원하기위해 소리 없는 중공군100만여명이 진을 치고 대기하다 압록강이 얼어붙자 일제히 도강을 실시하여 동년11월24일 청천강
상류일대에서 방어하던 국국2군단(7,8,6사단,군단장 유재흥,이듬해 현리전투 3군단장),하류에는 한국군1사단,미24사단,미1기갑사단 등을 배치하여 중공군과의 일전을 기다렸는데 국공내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주저함 없이 “전투력이 약한 한국군 2군단지역을 측방으로 공격하고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라.”는 공격을 지시합니다.
한국군 2군단은 순식간에 와해되고 미군마저 퇴각로가 차단될 처지에 터키군 여단이 중공군 38사단의 퇴로 차단에 맞서는 동안 미군은 평양으로 철수 하여 재정비 동년 12월23일 임진강, 한탄강 전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전쟁시 위와 같은 위협시 “청천강 대첩”을 이루어 100만의 중공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할 훌륭한 장수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필자는 중국군 국민당
군대에서 사단장까지 역임하며 국공내전에서 사단급이상 작전경험이 있었던 “김홍일 장군이면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상상을 해보며, 개전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지만 패퇴한 한국군을 수습하고 재편성하여 한강선 방어로 지연전을 펼치며 성공적으로 작전을 성공시킨 경험에서 비추어 보지만 아쉽게도 이승만 정부에서 배척을 받고 이듬해 중장으로 전역합니다.무능하고 한국말도 못하는 친일파 군인 유재흥을 중용한 그 당시 통수권자가 미워집니다.
유재흥은 “현리전투“인 이듬해 5월16일 3군단장이 되어 강원도 인제지역에서 중공군 춘계공세에 맞서서 전투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리고 화가난 미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작전지휘능력이 되지 않으니 한군군 작전권을 유엔군에 넘기라고 요청하고 이승만이 승인하여 현재까지 한국군의 전시 작전권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어 노무현 정부시절 전시 작전권 환수 추진시 가장먼저 성우회 회원을 이끌고 반대한 장본인이 국방장관까지 역임한 유재흥인걸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중공군의 춘계공세이후 적과 아군모두 승리가 쉽지 않다는 걸을 파악한 유엔군과 중공군은 휴전협상을 시작합니다. 중공군은 전장의 원거리로 인해서 본토에서 재래식 무기장비, 탄약, 식량 등 보급을 받기가 쉽지 않아 전쟁을 지속하기 어려웠고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앞에 지칠대로 지치고, 유엔군은 침략군을 38선이북으로 격퇴하여 전쟁의 목적은 달성된 것으로 보았고 중공군을 완전 물리치기에도 쉽지 않음을 깨달으며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 갑니다.

전선에서는 한치의 땅이라도 뺏어서 휴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치열한 소모전인 고지전이 전개되어 휴전시까지 처절한 전투가 전개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맥아더는 중공군에 원자탄 투하를 놓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 끝에 해임되고 미국의 군인출신 아이젠아워가 6.25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되어 휴전협정이 급물살을 타고 있었지만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대다수의 국민은 휴전을 반대하며 반공포로 석방 등의 강공책을 펼쳤지만 약소국의 외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1953년 7월 27일 휴전이라는 물줄기를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이승만은 철저한 실리외교로 미국과의 협상 끝에 1953년 10월1일 한국과 미국간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되고 이듬해 11월 18일에 발효 되었습니다.

6.25전쟁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한국은 미국에게 휴전 후 북한의 재침에 대비한 강력한 군사동맹을 요구하여 관철시켰고, 한국이 외부로부터 무력공격을 받을때만 미국은 원조한다는 것으로서, 한국의 북한공격을 용인하지 않으며 나아가 이를 감시 내지 견제하는 역할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휴전 후 대한민국은 한미동맹의 굳건함속에 주한미군이 주둔하며 재침을 막으며 경제건설을 통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 피울수 있게 되었다. 2차세계대전후 신생독립한 나라들 중에서 원조를 받던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고 무역 1조달러 달성한 지구상에 일곱 번째 나라이고, 경제분야에서 10위권의 선진국으로 자리매김하며 한류 경제, 문화, 예술 스포츠 등 자랑스럽지 않은 분야가 없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군사동맹에 이어서 경제동맹으로 미국이 한국의 반도체기술을 인정하고 미국에 투자를 요청하는 방한한 바이든 대통령을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나라에 외국군대가 들어와 있는 것은 자존심의 문제이고 보는 시각에 따라서 부정적인면이 많지만 동맹이 없는 현재의 러시아 침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한미동맹의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잘사는 독일, 일본에도 미국의 동맹으로 미군이 우리나라보다 더 많은 수가 주둔 합니다. 그 들은 경제 2, 3위 강국이고 선진국입니다. 반면에 미국과 동맹을 깬 필리핀은 가난한 나라가 되어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세계 각국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중국과 동맹을 맺은 나라는 잘 사는 나라가 없이 저개발의 가난에서 허덕이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안보는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가장 좋지만 부담이 너무 크기에 지구상에 경제력과 군사력이 가장 강한 나라인 미국과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 아니겠는가?

저작권자 © 주간태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