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일은 15세이던 1872년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가 총명한 아들의 출세를 위해 상경시켰을 것이다. 국정이 문란한 시대이기는 했으나 정치적 배경이 없는 청년들이 그나마 출세하는 길은 과거에 급제뿐이었다.한 해를 서울에서 과거공부에 매달리고 이듬 해(고종 10년) 문과에 거뜬히 급제하였다. 김구와 이승만도 과거를 보았다가 낙방했었다. 그는 대단히 두뇌가 우수했던 것 같다. 서울 생활은 그의 신상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어떤 인연이었는지 당대의 세도가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과 만나게 되었다.김윤식은 정부의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태안 마도 앞바다 정박 여건은 신진도와 마도가 만들어낸 천혜의 안전한 정박지이다. 지금도 태풍이 불어오면 아래의 장소에 피항하는 경우가 많다. 태안군 근흥면 마도길 158-7 인근에 위치했던 1123년 마도 안흥정은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신주의 정박지는 객주와 비교하여 수심이 다소 깊은 곳이면서, 안흥량 방향 물길이 합쳐지는 곳 근처일 것이며, 객주는 신주에 비하여 수심이 다소 낮은 고려 선박들의 전통 정박지 부근으로 추정된다. 어느 객관(客館)의 위치나 공통점은 주 정박지에서 멀지
이종일은 1858년 11월 6일 아버지 이교환(李敎煥)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충남 태안군 원북면 반계리이다. 본관은 성주이고 시조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20세손 이순유(李純由)이다.아버지 이교환은 향리의 유학자로서 지방에서 고사(高士)로 칭송되었다고 한다.이종일의 호는 옥파(沃坡), 도호(道號)는 묵암(黙菴)이고, 필명은 중고산인(中皐散人) 또는 중헌(中軒) 등이 있다. 또 다른 도호로 천연자(天然子)로 쓰
백화산 정상을 오르다 보면 태안 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이 있는 태을암의 바로 뒤편 도로에서 좌측 위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경고문’이 설치돼 있다. 그 계단을 오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뤄진 커다란 바위에 ‘降仙臺(강선대)’라고 깊게 새겨져 있는 글귀를 볼 수가 있다, 바로 그 앞에는 정자의 주초석으로 보이는 네모난 돌기둥 네 개가 아직도 박혀있음을 보아 옛날 건물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강선대라는 명칭은 우리나라의 도처에 있으며, 그 유래를 살펴보면 아름다운 경관지에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
본지는 이번주부터 오마이뉴스에 전 독립기념관 관장을 지내신 김삼웅 박사가 연재하고 있는 옥파 이종일 애국지사의 인물열전을 연재합니다. 오래 전부터 인물사에 관심을 쏟으면서 중국 후한시대 유소(劉)의 에 주목하였다. 이 책은 본격적인 인물 연구의 고전에 속한다.사람의 일부만 알려고 한다면 아침나절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의 많은 연보를 상세히 탐구하자면 사흘은 지나야 충분하다. 왜 사흘이 지나야 충분한가? '나라의 동량'은 세 가지 자질을 겸하고 있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진호신1123년 서긍이 통과한 서해안 항로상 군산정, 안흥정, 경원정, 벽란정에는 객관(客館)과 함께 정박시설(碇泊施設), 신앙시설(信仰施設), 병수처(兵戍處), 식수처(食水處) 등 부대시설이 함께 있었다. 여기에 조경(造景)과 풍수지리(風水地理) 등이 입지 선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음에서는 이러한 객관(客館)에 딸린 시설들의 특징과 상황을 알아보고자 한다.1. 정박시설(碇泊施設) 고려시대의 주요 항로상 기착지에는 반드시 풍파(風波)에 안전한 주 정박지가 있었고
태을암에서 동북쪽 30여 미터 지점에는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이 있고, 맞은편에 커다란 수직 바위에는 ‘태을동천(太乙洞天)’이라고 세로로 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또한 ‘태을동천(太乙洞天)’이 각자 된 바위 아래는 옹달샘과 ‘일소계(一笑溪)’라 새겨진 돌이 다듬어져 마치 비석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주변 암벽에는 김해 김씨 장보암과 시구(詩句)가 각자 돼 있고 그 바위 위의 ‘망양대’에는 보기 드문 암각 바둑판이 새겨져 있다.태을동천 바위와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사이에는 ‘감모대(感慕臺)’라는 3층의 8각형 석조물이 있는데 이를
학문적 연구와 지리적 위치의 고증작업을 위해서는 1차 사료의 정확한 번역과 해석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최근까지 우리나라에서 한국어로 번역된 『선화봉사고려도경』은 민족문화추진추진위원회 번역본(1977), 박상득 역 『선화봉사고려도경』(1995), 조동원 역주 『선화봉사고려도경』(2005) 등이 있다. 그러나 원전1)1) 『宣和奉使高麗圖經』의 3가지의 원전은 『징강본(徵江本)』, 『사고전서본(四庫全書本)』, 『지부족재본(知不足齋本』이 전해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 원본은 한자 표기상의 차이가 다수 존재하고 있으나 근본적 차이는 없
백화산의 지명 유래는 멀리서 보면 사시사철 부용꽃이 핀 것처럼 혹은 자작나무 숲처럼 하얗게 보인다 해서 ‘백화산(白華山)’이라 부르게 되었다.백화산과 관련,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중에는 “백화산이 흑화산이 되면 문만무천(文萬武千)의 인재가 나온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우리 군의 명산(名山)이며, 영산(靈山)으로 통하는 태안 8경 중 제1경에 속하는 산이기도 하다.전통 사찰인 태을암에서 약 500여 미터를 걸어서 봉수대가 있는 백화산(남봉) 정상에 오르면 좌측으로 ‘쌍괴대(雙槐臺)’라 깊게 각자한 커다란 바위를 만
양력 2023년 7월 25일(음력 6월 8일)은 서긍의 선화봉사 고려사신단이 마도 안흥정에 도착한지 900주년이 되는 날이다. 9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마도와 신진도 안흥량의 풍경과 바닷물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다. 서긍(徐兢, 1091~1153)의 자(字)는 명숙(明叔)이다. 송나라 휘종(徽宗)때 국신사(國信使)의 일원으로 1123년 정사 노윤적(路允迪)과 부사 부묵경(傅墨卿)이 동승하는 관선 신주(神舟) 2척과 민간 소유의 객주(客舟) 6척 등 인원 약 700여명을 대동하고 1123년 5월 26일 강남의 무
기념대(記念臺)태안문화원 고종남 원장의 백화산에 숨겨진 조상들의 이야기⑤태안문화원 원장 고종남가파른 백화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전통 사찰인 태을암이 나오고, 거기서 길을 따라 약 200~300미터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평평한 태일전 터가 나오면서 군부대 울타리가 시작된다. 군부대 정문 안으로 100여 미터를 들어가 보면 바로 도로 옆으로 남향한 큰 바위에 가로로 직사각형의 모형으로 파낸 후에 ‘記念臺(기념대)’라 행서체의 글씨를 음각하여 놓았으며, 그 아래에는 보다 큰 직사각형 모양의 돌을 파낸 후 주민들이 기념코자 하는 조
백화산은 우리 군의 자랑인 태안 팔경의 제1경으로 기암괴석과 푸른 소나무로 뒤덮인 아름다운 산이다. 산의 8부 능선 즈음에 있는 태을암 뒤편 도로 위에는 ‘동년대(同年臺)’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그 곳을 출입할 수 있는 길은 나 있지 않으나 잡목을 헤치고 올라가 보면 의외로 쉽게 오를 수 있는 가까운 위치에 있다.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등 잡목 속의 동년대 바위가 가려져 있지만 그 앞에 서면 파노라마 같은 거대한 바위 앞의 경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눈앞에 펼쳐지는 은빛 물결의 서해바다와 올망졸망한 섬들, 갯벌, 안갯속에 감춰
태을암에서 백화산 정상을 향하여 300여 미터의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군부대 철조망 안으로 보이는 커다란 바위에 ‘永思臺(영사대)’라고 각자 된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커다란 바위에 가로로 직사각형을 만들고 거기에 ‘永思臺(영사대)’라 가로쓰기 암각을 하였으며, 그 오른쪽에는 바위를 세로로 파고 ‘관찰사 김광묵(金光默)과 현감 박 형(朴 泂)’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이 세로쓰기로 깊게 새겨진 것을 볼 수가 있다. 백화산은 전체가 하얀 바위산으로 어풍대, 만천대, 무인대, 동년대, 쌍괴대 등 곳곳에 암각문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충남 태안군 이북면 의용군 징집자 조재관과 그의 아들 조용호 이야기 "여기에 물 갖다 부어라." "예, 아버지." 아버지 조백현이 대형 가마솥에 바닷물을 부으라고 하자 아들 조재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부지런히 움직였다.조재관은 집안 머슴들과 함께 물지게에 물동이를 걸고 바닷물을 나르느라 땀범벅이었다. 가마솥에는 물이 한정 없이 들어갔다. 가마솥이 폭 4미터에 높이가 2미터나 돼 열 명 넘게 머슴이 동원됐지만 만만치 않게 시간이 걸렸다. 20대 중반의 조재관은 얼마 전 첫째 아들 조용호가
한국전쟁기 태안지역 민간인학살 피해자 유족 가청과 한원석의 이야기 종일 집안 일가와 이웃집을 다니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온 가삼룡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집안 분위기가 흉흉하니 손자 가청(당시 10세, 장남 가종호의 아들)은 쭈뼛거리기만 했다. 가삼룡의 한숨은 계속되었고 손자는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라고 물었다. "아니다..." 어린 손자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가삼룡은 한참을 끙끙 앓았다.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아가..."하며 가청을 불렀다. "예, 할아버지." "네 작은아버지가 식전에 네 아버
▶ 태안 마도에 사신들의 순례길, 중국 문화촌 건립은 중요한 관광자원으로 거듭날 수 있어▶ 안흥진성 국가사적 지정으로 성안마을에 박물관, 숙박시설, 체험거리 개발 가능▶ 조선시대 안흥진 수군 군적부가 출토된 신진도 고가(古家) 복원사업 시급 마도(馬島)마도는 서긍이 저술한 고려도경에 안흥정(安興亭)이라는 송나라 사신들을 위한 객관이 위치해 있던 지역이다. 우선 마도지역을 관광 명소화 하기 위해서는 기록에 나타난 1123년 서긍의 안흥정을 복원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안흥정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현재 지표조사 결과 안흥정 터로 유력하게
한국전쟁기 태안지역 민간인학살 피해자 유족 지만월과 배광모의 이야기 지만월(84세, 충남 태안군 소원면 신덕리)은 대문에 걸려 있는 헝겊가방을 선물 보따리인양 손에 쥐었다. 안방에 들어가 가방을 여니 문제지가 나왔다. 연필을 쥔 그녀는 예시문을 그대로 받아썼다.'바다는 넓고 넓어요', '옷이 얇아서 추워요' 예전 같으면 발음나는 대로 썼을 글들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신덕리 마을회관에서
한국전쟁기 태안군 근흥면의 민간인학살... 학살은 보복을 낳고, 다시 학살로 이어져 피난을 갔던 최천수(가명)는 해군 309정에 몸을 싣고 충남 태안군 군흥면 정죽리에 있는 안흥항에 도착했다. 최천수의 마음 한켠에는 분노와 흥분이 일었다. 항구에는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 수십 명이 서 있었다. 뒷결박 지어져 항구에 서있는 이들은 다름 아니라 북한군 점령 때인 인공 시절 '부역혐의'를 받고 있었다. 해군 특무상사가 그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는 그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의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보복학살 부르며 방식도 참혹 "정춘영이 나와." "애 아부지는 없는디유..." "어디 갔어?" "글씨 어제 나가서 안즉 안 왔는디유."충남 태안경찰서 소원지서 경찰의 물음에 정춘영의 아내 이예순이 답했다. 경찰들은 찾던 사람이 없자 논에서 일하던 정춘영의 동생 정성영을 대신 연행했다. 보도연맹원 예비검속 방침에 따른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태안경찰서는 상부의 명령을
▶ 태안 마도 4호선은 나주(羅州)에서 한양 광흥창(廣興倉)으로 가던 조운선으로 밝혀져▶ ‘내섬(內贍)’이라는 명문으로 미루어 마도 4호선은 15세기 초반 태종 시기 조운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15년 충남 태안군 마도 해역에서 마도 4호선 수중발굴을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선체의 잔존 규모는 길이 13m, 폭 5m이며 ‘광흥창(廣興倉)’이 적힌 목간, ‘내섬(內贍)‘이 적힌 분청사기 등 총 386점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아울러 동반 유물과 선박 구조 등을 통해 수중발굴역사상 최초의 조선 시대 조운선(漕運船)임을 확인하였다.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