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면서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를 조직했다. 나라의 개화를 위해서는 신문발행과 시민조직을 통해 민력(民力)을 키워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독립협회에 참여하면서 별도의 조직을 하게 된 것은 독립협회가 권력에 의해 해체될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민력회를 조직한 그는 독립협회의 각종 행사에 회원들과 함께 하였다.그는 1898년 초부터 민력회의 조직을 구상하였다.신문발간사업을 의논하기 위해서 우리 집에 유영석·이종문·정교·장효근·염상모·이종면 등 여러 사람이 모였다. 모두 말하기를 "대한제국의 의의에
이종일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제국신문』에 보도하여 국민에게 알리는 한편 토론과 강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하였다. 국민계몽과 특히 여성의 권익향상 그리고 정부의 비정을 비판하여 바로잡는 것이 국난을 예방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의 군권과 민권을 수호한 최상 최대의 좋은 예이다. 이상재와 윤치호와 장지연과 내가 주재한 것이다. 여성회원 김 여사 등의 경우는 제국신문에서 여성들에게 사회참여를 역설했기 때문이다.요즈음 여성들이 방속에 갇혀 있는 습속은 이제 반드시 깨어 버려야 한다. 여성의 재능은 잠
사창리 감태바다와 감태채취. 가로림만인 이원면 사창리 갯벌에서는 설 명절을 앞두고 태안의 특산물인 감태 채취가 한창이다.
독립협회는 19세기 말엽 제정 러시아와 일본이 이권 침탈은 물론이요 한국을 식민지 속국화하려고 침략정책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고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열강이 이에 편승하여 경쟁적으로 이권 침탈을 자행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창립되어 이에 대한 맹렬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면서 독자적 근대 민족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의회 민주주의를 정립, 발전시킨 단체였다. (주석 24) 독립협회는 기관지 『독립협회월보』 창간호의 서(序)에서 작명의 의미를 밝혔다. 사람마다 독립하고 사람마다 협회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런데…&hellip
안면도 삼봉해수욕장 옆 모래 위 바위섬엔 정말 용이 살았을 법한 용굴이 있고, 용이 승천하며 갈긴 똥이라는 전설이 있는 자국까지도 선명한 ‘삼봉용굴의 일몰’
이종일의 『제국신문』에 대한 열정은 신문의 인기를 크게 높였다. 처음에는 1천부 가량을 발간했다가 곧 3천부로 늘렸다. 당시 서울 인구가 약 10만 명 정도여서 신문 3천부는 적잖은 부수이다. "신문발간에 대한 여론을 들으니 점점 여성독자가 증가하여 제국신문을 구독하고 있으며 관심도 높아졌다는 이야기이다." "제국신문을 증면 발행함과 함께 3천부를 증간했는데 이것은 독자층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 19)그는 신바람이 났다. 자신감과 신념을 일기에 썼다.돌이켜 보건대 민중의 신문인 제국신문은 경향간의 민중들로부터 절
지금까지 15회에 걸쳐 「백화산에 숨겨진 조상들의 이야기」란 주제로 주로 바위에 새겨진 글을 사실에 기초하여 객관성을 기하고자 최대한 기록을 찾아서 쓰려고 노력하였다. 많이 부족했지만 읽어주신 독자님들과 전화로 또는 만남을 통해 필자에게 글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백화산은 우리 군민에게 어떤 존재인가? 백화산은 군민의 정신적 상징성과 애환을 간직한 영산(靈山)이요, 태안 8경 중 제1경에 속하는 진산으로 유·불·선교(儒·佛·仙敎) 및 민간신앙의 성지이다. 따라서 역사·문화적으로 보전가치가
『제국신문』은 타블로이드 반절판 4면을 발행하였다. 3단 종서로 본문 활자는 12포인트, 각 면별 기사 배정을 보면 1면은 논설, 2면은 관보, 3면은 잡보, 4면은 광고로 채웠다. 초기의 타블로이드 절반 판형이 1904년 9월부터 타블로이드판으로 넓히고, 1905년 12월 1일부터 지면 배정의 혁신을 통해 1면을 전면광고, 논설 2면, 3면 관보, 4면 잡보를 실었다. 사설과 논설은 대부분 이종일이 썼다. 제국신문의 논설은 국민들에게 개화사상과 자강의식을 고취. 계몽시켜 우리 민족의 새 역사의 장을 열어보겠다는 옥파의 집념과 의지
우리 조상들은 신령스러운 영산 백화산을 보면서 “백화산이 흑화산이 되면 문만무천(文萬武千)의 인재가 나온다.”는 전설을 기원하며 믿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자연을 숭배해 왔던 인류는 신앙적 요소가 내재하여 특히 거목(巨木)과 거석(巨石)은 경배 대상이 되었다. 돌산으로 이뤄진 백화산 바위에 새겨진 글들은 어느 내용이든 간에 모두 글을 새긴 사람들의 소망(所望)이 담겨 있다고 본다. 백화산은 앞서 기술한 바 있듯이 기암괴석과 태을낙조(太乙落照)가 장관이며. 산 정상에 오르면 서해바다와 태안반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애삼
태안의 진산(鎭山)인 백화산은 마애석불의 효시작품 태안동문리 마애삼존불입상과 태일전, 영사대, 쌍괴대 등 역사적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영산(靈山)으로 태안반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태안 팔경 중의 제1경에 속하는 명산(名山)이기도 하다. 백화산 정상에 오르다 보면 도교의 제사를 국가에서 지내던 ‘태일전’ 터를 만난다. 태일전은 태일성에 제를 올리던 곳으로 우순풍조(雨順風調)와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던 곳(전각)이나, 이 태일전(터)을 두고 단군 영정을 봉안하였다는 등 왜곡되고 잘못된 정보가 난무하고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실제
"太乙洞天(태을동천)"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으로 신선이 산다는 신비로운 동산이자 초월적인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백화산 태을암에 있는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맞은 편에는 직립된 거대한 바위에 ‘태을동천(太乙洞天)’이라고 크고 깊게 새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그 글의 바로 우측에는 ‘계해맹추해초김규항제(癸亥孟秋海超金圭恒題)’라고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가락기원 일천팔백팔십삼년 갑자(駕洛紀元 一千八百八十三年 甲子)’라는 조성연대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계해년은 1923년을 말하며, 맹추는 음력 7월을 달리 이르는 말로
이종일이 직접 쓴 창간사의 주요 내용이다.대한제국 광무(光武) 이년 서력 일천 팔백 구십 팔년 파월 십일은 곧 본사 신문이 처음으로 발간한 날이라 이날은 본사에서 특별히 경축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몇해를 두고도 특별히 기념해야 할 날인데 다만 본사의 목적은 아무쪼록 흥왕하여 나라 안에 유익한 사업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니 이 신문이 흥왕하고 나라가 개명되어 한 가지 사업을 이룬 후엔 오늘 낸 여러 가지 기사의 글 조각들을 모아 두었다가 몇 해 후에 꺼내 놓고 보면 국민의 자세한 역사가 어언간 몇권 될 것이다.그때 상고해보면 그동안 변
이종일은 중추원 의관 자리를 흔쾌히 내던지고 야인의 길에 나섰다. 예나 지금이나 재야는 춥고 배고픈 지대이다. 권력의 박해가 따르고 주민(시민)들의 몰이해도 따갑다.그는 당시만 해도 생소하고 낯설은 언론인의 길을 택하였다. 언론(신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거웠다.근대적 신문을 통해 실학사상과 동학의 근본정신인 '보국안민'을 이루고자 한 것이다. 신문발간을 위해 여러 사람과 의논하였다. 그는 당시 태동한 만민공동회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신문창간을 서둘렀다.동지 이동녕이 찾아왔다. 이 동지는 30여 세의 청년지사로서 그는
同庚臺(동경대)戊辰仲春(무진중춘)檀君紀元四千二百二十四年辛卯生 (단군기원사천이백이십사년 신묘생)李興雨(이흥우), 崔丁台(최정태), 李完雨(이완우), 柳應祚(류응조), 李文雨(이문우), 李暘雨(이양우), 李喆雨(이철우), 金相信(김상신), 姜鐘憲(강종헌), 李公伯(이공백), 李澤雨(이택우), 李周玉(이주옥) 백화산 중봉에는 동경대(同庚臺)가 있다. 동경대에는 위와 같은 글이 바위 전·후면에 새겨져 있다. 먼저 "同庚"이란 둘 이상의 사람이 같은 해에 출생했거나 같은 연령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므로 동갑을 기념하기 위한 대
조선사회는 후기에 이르러 개신유학에서 발원하는 실학사상이 전개되었다. 성호 이익의 중농학파→연암 박지원의 이용후생학파→다산 정약용의 경세치용학파로 이어졌다. 이같은 실학사상의 도도한 맥락이 수구파의 위정척사세력에 번번히 토멸당하면서 개화ㆍ개벽의 기회를 잃고 나라는 점차 나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이종일은 박은식·정교·이동녕·남궁억·양한묵 등 개혁파 지식인들과 실학을 공부하고 개화사상으로 무장하였다. 그리고 동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1860년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1864년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대구감영에서
丙申同年紀念 (병신동년기념) 金東珍(김동진), 李尙敦(이상돈), 朴東薰(박동훈), 金世鶴(김세학), 金宗模(김종모), 明珪喆(명규철), 孫忠穆(손충목), 金應濟(김응제), 李澤俊(이택준)昭和 四年 七月 (소화 4년 7월, 1929년 7월) 백화산의 구부능선 군부대 철조망 앞에는 평평한 주차장 형태의 태일전 터가 있고, 바로 옆에(북쪽 방향)는 두 개의 바위가 겹쳐 있는데 뒤에 있는 바위에 만천대(萬千臺)가 있으나 지금은 가시덩굴이 우거져 접근하기 어렵고 앞 바위에 가려져 일부만 보인다. 그 바위에 새겨진 내용은 이렇다. 1896년(
이종일이 젊은 시절 수신사 박영효(朴泳孝, 1861~1939)를 수행하여 일본을 다녀온 것은 그의 세계관을 많이 넓히는 일대 사건이다. 25세이던 1882년 9월 12일 서울을 출발하여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메이지유신 이후 변화된 일본을 두루 살폈다.수신사는 박영효가 특명전권대사이고 종사관은 서광범, 일행 중에는 민비의 측근 민영익, 개화파의 김옥균을 비롯 다수의 개화당 인사들이 참여했다. 젊은 학생 10여 명도 함께 하였다. 이종일이 수신사 일행에 포함된 자세한 과정은 찾기 어렵다.조선 정부는 강화도조약 이후 종래의 통신사를 수
戊辰 八月 日 題 (무진 8월 일제)明珪善 , 朴泳善 (명규선, 박영선)무인대(戊寅臺)는 백화산 정상 군부대 철조망 안에 있어 아쉽게도 일반인들은 접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진참조) 무인생(1878년)인 명규선과 박영선 두 사람이 50세가 되던 해인 무진(戊辰) 8월(1928년 8월)에 동갑내기 친구 간의 우정을 기념키 위해 백화산 바위에 행서체로 ‘戊寅臺(무인대)’라 각자 하였다. 명규선은 「조선환여승람」 음사편(蔭仕編)에서 설명하고 있다. 명규선(明珪善)의 자는 사권(仕權), 호는 오은(梧隱)이며 연안(延
"금란지교(金蘭之交)"는 우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우리 군 백화산에는 금란대(金蘭臺)가 있는데 그 위치는 마애삼존불입상과 동년대의 중간지점으로 백화산 정상으로 가는 태을암 뒷길(車道) 바로 옆 커다란 바위에 행서체로 각자되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금란(金蘭)’은 금란지교(金蘭之交)의 준말로 네이버 한자사전에 의하면 ‘「단단하기가 황금(黃金)과 같고 아름답기가 난초(蘭草) 향기(香氣)와 같은 사귐」이라는 뜻으로,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마음이 맞고 교분(交分)이 두터워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해 나갈 만큼 우정(友情)이
이종일은 15세이던 1872년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가 총명한 아들의 출세를 위해 상경시켰을 것이다. 국정이 문란한 시대이기는 했으나 정치적 배경이 없는 청년들이 그나마 출세하는 길은 과거에 급제뿐이었다.한 해를 서울에서 과거공부에 매달리고 이듬 해(고종 10년) 문과에 거뜬히 급제하였다. 김구와 이승만도 과거를 보았다가 낙방했었다. 그는 대단히 두뇌가 우수했던 것 같다. 서울 생활은 그의 신상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어떤 인연이었는지 당대의 세도가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과 만나게 되었다.김윤식은 정부의